책소개
러시아 군주 표트르 대제의 삶, 시대, 유산을 다룬 평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이자 낙후한 러시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개혁가 표트르 대제(1672∼1725)의 기이한 삶과 그의 위대한 업적, 그리고 그의 사후 평가까지 포함한, 명실상부한 표트르 대제의 본격 평전. 이 책은 전제 군주로서 표트르가 공적으로 쌓은 정치적·군사적·문화적 업적을 담담하게 서술하면서도, 표트르 개인의 행동·생각·취미·교우관계·재산·여자관계 등 표트르의 독특한 개성에도 초점을 맞춘다. 특히, 난쟁이·변장·광대·반달리즘·전쟁놀이·건축·조선술·해부학 등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기이한 성격까지 세세하게 묘사하여 인간 표트르의 실제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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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표트르의 개혁과 한계
표트르의 개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군사면에서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해군을 창설하고, 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당시 막강했던 스웨덴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발트해를 장악했다. 해군의 창설을 위해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을 직접 방문하여 조선술과 항해술을 익혔고,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그는 러시아 최초로 신문을 발행하고, 문자를 정비했으며, 출판을 장려했다. 또한, 여러 반발을 무릅쓰고 당시의 서유럽에 비해 훨씬 촌스럽고 불편했던 복식을 정비했다. 그는 소매가 긴 러시아의 전통복장을 폐기하며 독일식 의복을 입도록 명령했고, 턱수염을 기르는 러시아의 전통을 무시하고 모든 백성에게 면도를 하도록 강요했다. 의복과 수염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지만, 그는 이를 관철했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그는 구식 군대인 스트렐치를 해산하고 새로운 신식 군대를 창설했으며, 학교를 설립하고, 지방행정기구를 정비했다. 또한, 국가의 주요한 정책을 의결하는 원로원을 창설하고, 행정을 집행하는 12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저자는 표트르 개혁의 한계 또한 지적하고 있다. 즉, 표트르가 추진한 개혁은 대체로 그의 부친 알렉세이가 기틀을 다진 것이었고, 개혁의 상당 부분이 재위 시절에 저항에 부딪혔으며, 그의 사후 폐기된 부분도 많았다. 또한, 근본적으로 그의 개혁은 소작농 위주의 전제 정치제도를 바꾸는 혁명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고, 전제군주제라는 기존의 착취제도를 최대한 활용하여 이룩한 성과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표트르의 공적 업적에 가려진 사생활을 낱낱이 추적
보통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기록한 평전이 주로 위인의 역사적 업적과 공로를 위주로 서술한 반면, 이 책은 표트르라는 한 개인의 사생활에 관해서도 매우 세세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의 삶은 극적인 사생활과 기이한 사건으로 가득하다. 또한, 방대한 기록 덕분에 러시아 역사상 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제대로 갖춰진 최초의 러시아인이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표트르는 태어났을 당시의 키가 50cm였고, 어린 시절 후계자로 지목되지 않은 탓에 기본교육을 못 받아 필체와 맞춤법이 형편없었으며, 성인이 되었을 때의 신장은 거의 2미터에 달했다. 그는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재빨리 마실 만큼 대식가였고, 남들에게도 억지로 술을 먹이기 좋아했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11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7시에 저녁을 먹은 다음 바로 잠자리에 들었으며, 취미는 발치(拔齒), 사체 부검, 목재 가공 등의 선반 작업, 소방 활동이었다. 또한, 그는 동물을 사랑하고 사냥을 싫어했으며, 바퀴벌레를 무서워했다.
이처럼 저자는 당시 러시아 궁정에서 작성한 공식 일지와 출간된 기존의 연구 저작은 물론, 표트르와 그의 주변 인물들이 서로 주고받은 개인 서신과 서유럽 각국의 외교관·예술가·건축가들의 증언·보고서·편지·회고록 등도 두루 활용하여 그의 공적·사적인 생활을 세밀하고 균형 있게 서술한다.
아들과의 불화
표트르와 그의 아들 알렉세이의 관계를 보면, 마치 영조와 사도세자가 떠오른다. 표트르는 알렉세이의 정신적·육체적 허약함을 싫어했고, 알렉세이 역시 표트르의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태도에 부담을 느꼈다. 알렉세이는 부친 표트르의 명령으로 혼인하게 된 샤를로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표트르는 이 일을 탐탁잖게 여겼다. 두 사람의 갈등에는 알렉세이의 모친이 표트르에게 쫓겨나 수녀원에 유폐된 일도 영향을 끼쳤다. 표트르는 원치 않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를 결코 사랑한 적이 없었고, 알렉세이도 자신의 나이 겨우 여덟 살에 모친을 유배한 부친을 사랑할 수 없었다.
1716년, 알렉세이는 전투에 참전하라는 부친 표트르의 명령을 받고는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도피했다. 이 사건에 대해 표트르는 자기 아들이 외국의 도움을 받아 반역의 선봉에 선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알렉세이가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군사력을 동원해 자신에 대한 공격을 요청했다고 의심했으며, 이런 행동이 부친을 살해하는 “패륜 행위이자 범죄”라고 생각했다. 1718년, 표트르로부터 용서 약속을 받고 돌아온 알렉세이는 왕권을 포기해야 했고, 러시아를 탈출하도록 도와준 ‘공범들’의 이름을 대라는 심문을 받았다. 알렉세이와 친하거나 그에게 동정적이었던 많은 인사가 처벌을 받았고, 알렉세이 역시 심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부자간의 갈등이 아니라, 표트르가 추진한 개혁과 이에 반대한 보수 사이의 갈등으로도 해석된다. 아들 알렉세이는 모든 면에서 러시아의 구식 관습을 지키고 선호했다. 그는 표트르가 벌이는 유흥을 혐오하고, 표트르가 창설한 해군을 싫어했으며, 의복 및 교회 자산과 관련된 개혁에도 반대했다. 또한, 모스크바를 선호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싫어했으며, 러시아의 무력 팽창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표트르가 아들을 고문하여 죽게 한 것은 결국 자신의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표트르의 기행
표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에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세상을 뒤엎을” 정도의 반전과 풍자를 사랑했으며, 재위 시절에 벌인 여러 가지 일탈과 기행(奇行)으로도 이름이 높다. 그가 건축한 페테르고프나 스트렐나 같은 화려한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을 모방하여 지었을 만큼 규모가 크고 화려하지만, 그는 그런 궁전보다 조그마한 통나무집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그는 가짜 왕실과 가짜 교회를 만들어 ‘케사리 군주’라 불린 가짜 차르와 가짜 총대주교를 세워 놓고, 이 가짜 군주의 신하이자 가짜 주교의 신도처럼 행동했다. 또 ‘취중총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놓고 러시아 정교의 위선적인 종교의식을 풍자했다. 이 취중총회를 통해 표트르는 온갖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는데, 돼지와 곰에 멍에를 씌워 수레를 끌게 한다든가,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며 폭음을 일삼았고, 각종 가장무도회와 놀이를 벌였다. 표트르는 엄청난 폭음을 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역할 놀이에도 열중했다. 대사절단의 일원으로 네덜란드와 영국에 들렀을 때, 그는 자신을 차르가 아닌 조선공으로 가장했다. 또한, 전투에서는 포병으로 참전했고, 군대 내에서 하급 장교부터 차근차근 승진의 단계를 밟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의 가이드북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발트해를 장악한 후, 해안가 습지에 계획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이 도시의 건설 계획에 표트르가 기여한 공로는 지대했다. 그는 건설의 모든 단계에 참여하여 중요 도로(넵스키 대로) 건설과 주요 건축물의 준공을 진두지휘했다. 지금도 넵스키 대로는 그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이며, 그의 지휘 아래 조성된 서유럽풍의 건축물과 궁전은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과정을 상세히 서술한 이 책은 인물평전이자 역사서이지만, 그 도시를 여행하려는 관광객에게도 유용한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그 어떤 관광안내 책자보다도 상세하고 충실하게 이 도시의 건설 과정을 소상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은 침수되는 해안가 불모지였던 이 도시에 표트르가 처음 도로를 건설하고, 가로등을 세우고, 건축물을 짓고, 치안을 확립하는 과정까지 소상하게 설명한다. 기존의 관광 안내서가 유적지와 교통편, 그리고 이른바 ‘맛집’ 소개에 치중하고 있다면, 이 책은 인문관광안내서로서 도시의 건설과정에서 표트르가 맞닥뜨려야 했던 반대와 저항,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표트르의 고뇌와 투쟁을 충실히 담고 있다.
표트르의 유산
1993년에 자유유럽방송이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을 찾기 위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표트르는 44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레닌이 16퍼센트의 빈약한 득표율로 2위를 차지했다. 1994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역사상 러시아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라는 주제로 실시한 또 다른 조사에서는 54퍼센트의 러시아인이 표트르의 재위 시절을 선택했다(스탈린의 시대가 약 20퍼센트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했다). 이런 결과는 과거의 부패와 전혀 관련 없는 강력한 사람이 정무를 개입하고 책임지기를 바라는 대중의 갈망이 반영된 측면도 있고, 표트르의 재위 시절에 러시아가 강성했었다는 대중의 인식 덕분이었다.
그런 덕분인지 표트르를 기리는 현상은 그의 사후부터 현재까지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구소련 시기에 스탈린과 레닌을 기리는 현상이 잠깐 있었지만, 표트르를 기념하는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그의 이미지는 조각상·그림·기념품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죽음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술가와 조각가들이 건축물·미술관·박물관·기념행사에서 그를 어떻게 기념해 왔는지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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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도판 설명 018/서문 020/러시아어 표기·날짜·통화 일러두기 028/로마노프 왕조 가계도 029/[지도1] 표트르 재위 시절의 러시아와 주변 나라 030/[지도2] 상트페테르부르크 031
I. 성장 1672∼1689
차르의 출생 033/1672년 러시아 036/어린 시절 050/1682년의 스트렐치 반란 056/소피야와 ‘호반시나’ 060/이반과 표트르의 초상화 066/섭정 074/전쟁과 해군 놀이: 프레오브라젠스코예 077/결혼 080/크림 전투: 소피야와 골리친의 몰락 082
II. 위대함의 서곡 1689∼1697
나리시킨 가문 087/외국인 친구들 091/교황 공후와 케사리 공후 094/나탈리야 나리시키나의 죽음 096/코주호보 군사훈련 100/멘시코프 102/아조프 전투 107
III. 대사절단 1697∼1699
표트르 미하일로프 113/리가에서 당한 모욕과 프로이센 방문 116/잔담의 작은 집 119/네덜란드 공화국 122/영국 125/넬러 127/안개 낀 앨비온의 인상 130/1698년의 스트렐치 반란 137/면도칼 휘두르기 140/스트렐치의 처벌 144
IV. 스웨덴과의 전쟁 1700∼1708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수용하다 149/표트르의 육군 154/1700년 나르바 159/결혼식과 수학 164/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167/마르타 스카브론스카야 172/마카로프와 국무조정실 175/폴란드와 발트해에서 벌인 전쟁과 아스트라한의 반란 177/칼 12세를 기다리며 183/불라빈 190/칼 12세의 남하와 마제파 194
V. 폴타바에서 프루트로 1709∼1711
폴타바 199/북방의 튀르크 208/되찾은 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장 214/두 건의 결혼 217/튀르크와의 전쟁 222/원로원 223/‘진정한 합법적 왕비’ 227/프루트 전투 229/알렉세이와 샤를로테 233
VI. 표트르의 유럽 체류 1712∼1717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결혼 239/독일 문제 246/핀란드 250/항코에서 거둔 승리 254/교황 공후의 결혼식 257/두 표트르의 출생 261/유럽 장기여행 264/파리 271/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과 위원회의 구성 274
VII. 아버지와 아들들 1718∼1720
표트르와 알렉세이 283/마녀사냥 286/기형과 괴물들 290/알렉세이의 재판 293/알렉세이의 죽음 296/회합과 『청춘의 훌륭한 귀감』 300/경찰국장 306/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죽음 310/함대에 대한 열정 314/법령과 규정 320/취미 323
VIII. 뉘스타드의 해, 1721
크리스마스 방문 329/ 종교회의 332/축하행사와 처형 341/안나와 카를 344/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낸 여름 350/니키틴의 초상화 351/뉘스타드 평화조약 354/러시아의 베르사유궁 361
IX. 관등과 규정, 1722∼1723
「관등표」 371/후계자 승계 375/추가 법률 378/총감찰관 384/감찰관, 재판관, 경찰국장 387/페르시아 전투 390/사육제와 장례식 395/해군의 시조 398/페르시아 전쟁의 종결 401/차리차 프라스코비야의 죽음 403/외로운 고투: 수뢰·부패·번문욕례 405
X. 대관식과 장례식, 1724∼1725
평화의 해 413/과학원 416/온천 치료 418/예카테리나의 대관식 422/가족·목양 등의 여러 현안 426/성찰 430/빌럼 몬스 사건 435/죽음 440/“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는 …… ” 443/임종의 초상화 444/슬픔의 성채 448/장례식 451
XI. 유산
황제가 죽었다. 새로운 여제 만세! 456/국내 개혁의 대차대조표 460/세계적인 강대국 467/서방으로 향한 창 471/개혁가인가, 혁명가인가?: 17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표트르에 대한 관점 477
XII. 표트르를 기리며, 1725∼2002
그림과 조각상: 1725∼1917 489/표트르가 머물던 장소들 502/표트르의 유품 513/표트르의 기념일 515/소비에트 시대의 표트르 522/소비에트 시대 이후와 포스트모던 시대의 표트르 528
축약어 550/주 555/엄선한 참고문헌 584/옮긴이의 말 609/인명 로마자·러시아문자 대조표 616/찾아보기 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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