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1세기에도 인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
인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인문학의 통렬한 자기반성
인간의 역사와 같이 해 온 인문학의 문제와 해결책에 관하여 서술한『인문학의 즐거움』. 이 책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윤리와 도덕기준을 알려주는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단순한 텍스트의 몰입과 전문화로 인해 대학이라는 좁은 세상의 범주안에 안착한 인문학은 특권의식을 버리고 변화해야하며 틀을 깨고 세상과 만나야 한다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자기 반성적인 고백을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기초학문의 위기이며 인문학의 부재는 인간성 상실을 부를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사회문화 예술과 같은 다양한 방면에서 인문학을 하는 전문가들의 역할이 어떠한 것인가를 고민한다.
《인문학의 즐거움》에서는 미국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미국 인문학의 19세기까지의 역할과 모습, 산업경제의 성장과 발달로 인한 사회적 분리와 영문학의 몰락과정을 시대별로 보여준다. 또한 인문학의 본질은 텍스트의 비평이 아니라 일상 생활과 연결된 예술적 활동임을 말하고 학문이란 결국 삶을 지속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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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인문학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06년 9월 1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선언’이라는 전대미문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선언문의 요점은 인문학의 현실, 즉 인문학이 그 존립 근거와 토대마저 위협받는 현실을 성토하면서 인문학이 존중받는 사회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문은 큰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선언문에서도 인문학이 가진 오만이 드러났기에 한순간의 호기심 외에는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학문분야이다.
그러나 지금 인문학의 위치는 어떠한가?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과 가장 가까워야 하는 인문학이 지금은 인간과 사회와 고립되어 있으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
21세기에도 인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 살아남는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이 책 『인문학의 즐거움』은 인문학이 걸어온 길과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한다.
인문이 가진 문제는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인간의 역사와 같이 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철학이나 수사학 등 인문학은 존재했고, 현재도 그 이름을 달리 할 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인문학은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윤리와 도덕기준을 제시해주는 학문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요구된다. 그렇기에 인문학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지금 현재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상태로 가다가는 어느 날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공룡 같은 과거의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삭막한 환경이라면 지금 당장은 모르겠지만 다른 학문도 그 존립을 장담할 수 없다. 인문학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인문정신의 중요성이 망각되면, 개인의 발전, 사회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 곧 인간의 위기인 것이다.
우리는 '인문학 논쟁'을 통해,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실체와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사람, 즉 인문학 내부의 사람이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인문학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문학자의 자기반성록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문학은 변해야 하고, 인문학은 위기에 처했으며, 인문학은 고립되어 있다는 것. 오늘날의 인문학은 세상 문제들로부터 동떨어져 있고, 다른 학문들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1부에서는 19세기 미국의 변화상을 따라간다. 지역사회의 결속이 무너지고 거대한 행정정부가 등장하면서 지식의 성격이 바뀐다. 그에 따라 지식을 많이, 빠르게 습득하는 자와 적게, 늦게 습득하는 자의 편 가르기가 시작된다. 전문화 문화는 그런 배경에서 탄생된 것이며, 전문화 문화가 형성되면 지역 차원의 지식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지식과 무지의 간극이 커지면서 인문학은 의학과 법학, 과학을 모델로 전문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부에서는 이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찰하면서 새로운 인문학을 모색한다. 이론이 부상하면서 인문학은 텍스트에 더 몰두하게 되고, 이는 인문학에 특권을 부여해준 대신 인문학의 고립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 중심의 이론이 성행하면서 인간인 우리 자신도 소외되고 만다.
저자는 인문학은 삶의 예술이어야 하고, 이때의 예술은 비평, 철학, 역사 같은 것이 아닌, 경험으로서의 예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텍스트에 몰입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연관되는 것, 작은 세계들이 모여 모든 것과 연관을 맺는 것, 이것이 저자가 추구하는 인문학의 방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닫은 문을 다시 열고 나와야 한다. 상아탑 안에 유리되어 자신들만의 특권을 누리는 대신 인문학은 그 중심이랄 수 있는 인간을 소외시켜버렸다. 인문학이 가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인문학은 다른 학문들과 벽을 쌓고 사람과 사회가 구분 짓고 스스로 정한 테두리를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 사이의 학문적 대화는 끊어졌고,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각자 가진 언어로 제자리를 맴돌 뿐 근본적인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한 행동은 단순한 언어의 유희이고 자신들만의 지적놀이였다. 자신만의 논리로 상대의 지식을 폄하하고 학문의 권위를 내세웠다. 이것은 인문학이 전문화의 길을 걸으면서 다른 학문들 혹은 세상을 유기하기 시작하며 나타난 폐단이다.
인문학은 전문화의 길을 택하면서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 전문화=학문적이라는 잘못된 공식을 대입하여 텍스트에 몰입하기 시작하면서 현실과 괴리되기 시작했고 다른 학문들과도 멀어졌다. 이제 인문학은 스스로 닫은 세장의 문을 열고 나와야 한다. 인문학이 사람들의 삶에 기여할 수 있다면 대중들은 다시 한 번 인문학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지도 모른다. 인문학은 학문에 따른 전문화를 현실세계의 활동 영역에 따른 전문화로 교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앞으로 우리는 “의학 인문학,” “법 인문학,” “경제 인문학,” “미디어 인문학”이란 분야를 접하게 될 지도 모르며, 그 각각은 전문화 프로그램 혹은 전문화 준비 프로그램에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스스로 잠근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대학 바깥에까지 가져갈 수 있을 때 인문학은 그 임무를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곳은 천 년 전의 과거도 천 년 후의 미래도 아닌 부서지기 쉽고 두렵기도 한 바로 지금의 이 세상이다.
위기의 인문학을 위한 새로운 모색
인문학관련 학과의 입학생률의 하락, 나아가서 인문학과의 폐지 등 우리나라 인문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인문학관련 종사자들의 외침은 한순간 대중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반성 없는 그들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저자의 주장은 한국의 새로운 인문학 모색을 위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할 때 인문학자들은 자기반성을 베이스로 삼고는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에 있다고 말한다. 물질에 집착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열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수 없는 인문학은 소외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르게 말한다. 인문학이 소외된 결정적 이유는 스스로 대중들과 멀어지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문학은 어렵다. 그리고 인문학이 사용하는 언어도 어렵다. 대중들이 인문학을 낯설어할수록 인문학들은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에 몰두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더욱 강화했다. 자신들의 언어와 학문을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스스로를 위안한 것이다. 이제 인문학은 스스로 쌓은 벽을 허물고 대중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야 한다. 그것만이 인문학이 21세기에도 아니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기초학문의 위기이며 기초학문의 위기는 모든 학문의 위기, 즉 사회 존립 자체를 흔드는 위기가 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성을 가르치는 학문이기에 인문학의 부재는 인간성 상실을 부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비평인가? 아니면 텍스트에만 몰입하고 스스로 그은 테두리 안의 사람들만 끌어안는 자기만족적 존재인가? 인간, 사회, 문화, 예술 등 이 분야에서 전문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책은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고찰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저자는 소포클레스에서 제임스 에이지, 프랭크 렌트리키아, 디팩 초프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자들을 섭렵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한다.
한국의 상당수의 인문학자들이 신문의 칼럼조차도 소화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또한 학문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인문학 구성원들이 대학의 시스템 속에서 밥그릇에 연연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한국의 인문학에 통렬한 반성으로 다가올 것이다.
▶ 각 장의 내용
1장 인문학을 바깥세상으로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인문학은 반드시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이 현대의 전문직 형태를 갖춘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았으며 그 위상도 위태로웠다. 19세기 종반까지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는 수사학과 고전학이었지만 이 두 학문은 한 세대라는 짧은 기간 내에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인문학은 이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대신, 주로 상징적이고 잘못 해석된 문제들을 놓고 진영을 나누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는 우리가 어떤 책은 가르치고 혹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의 삶으로부터 점차 고립되어왔기 때문이다.
현대의 인문학이 대학에서 그 터전을 마련했으며, 물리학과 의학을 모델로 하여 특수화된 전문직의 형태로 변화되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 결과 인문학은 확실한 기득권을 갖고서 예술과 사상은 아주 먼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2장 민주주의의 태양, 서구에서 지다-유능한 시민에서 무지한 대중으로
1960년대의 마감과 더불어 미국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972년 4월, 핀리는 뉴저지 주의 러트거스대학교에서 한 강의에서, 미국의 붕괴를 시사했는데, 그것은 미국이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며, 적어도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알고 있었을 형태의 민주주의 국가는 전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산업경제의 성장이 새로운 문화적ㆍ정치적 중앙집권화와 병행해서 일어나면서 지역에서 생산되던 문화가 먼 데서 수입해 오는 것으로 바뀌자 섬 공동사회 내부의 관계에 미묘하고도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시골의 공동사회가 “개인주의” 정신에 자리를 내주면서 개인적 자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세대 간의 격차는 점점 넓어지고, 공교육 제도는 급성장했으며 책으로 세대가 분리되고 있었다.
국민의 대다수는 이제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한 자기통제권이 없으며, 가장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지휘하는 정부가 뿌리 뽑힌 대다수의 미국인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믿음이 암암리에 퍼지면서 엘리트들 사이에는 이성과 계통성, 그리고 과학이 시민들의 “단순한” 의견을 대체해야 한다는 확신이 굳건히 자리 잡는다.
3장 거대한 분리-시민사회와 전문가
‘전문직’은 18세기 이전만 해도 거의 모든 직업 활동에 쓸 수 있는 단어였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미국에서는 전문직과 단순한 생업의 차이가 권력과 상대적 무력함의 차이를 의미했다. 산업화 이전의 미국에서는 직위는 특정한 업무보다는 지역적 결연과 의무체계의 어디쯤에 위치하느냐에 달려 있었지만 1세기 뒤에는 사람이 곧 직업을 의미하게 되었다. 곧 새로운 계층질서가 예전의 계층질서를 대체하게 되었다.
현대세계에서 지식과 무지의 ‘문화적’ 간격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전문가로 구성된 엘리트 계급과 다수의 일반시민들 간에도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분리가 존재한다. 19세기의 대부분 동안 전문가들은 지난 날 공동사회에서 쓰던 어법을 끌어와 그들의 전문가로서의 위상을 정당화했다. 대중의 종복으로서의 전문가 이미지는-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충실한 의사- 진보주의의 시대 동안 공동사회의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회적 지도자로서의 전문가 이미지로 변화하였다. 교육이 그러한 분리를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 새로운 지식은 설득을 목적으로 해서 동료 시민들에게 다가서기보다는 다른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서로 연합하여 대중을 조직하고 개혁하는 일을 맡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신흥 전문인과 구 전문인을 구분 지은 것은 전문인들 스스로가 형성했던 일반인들과의 거리였다.
4장 영문학의 문제-전문적 인문학의 부상과 함께 인문학이 시민사회를 유기하다
영문학의 창건자들은 옛 귀족 문화의 장식물들을 빌려와서 영문학을 완전히 현대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들에게 “최고”란 유럽의 고급문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인 유럽은 여러 면에서 그들 스스로가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했으며, 살아있는 유럽의 일류 작가와 화가들의 작품은 배제되어 있었다.
영문학의 타당성은 엘리트와 대중계급의 구분을 유지하는 데 달려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분화가 역사학이 명백히 민주적인 사유의 전통을 오랫동안 확립해온 이유와 영문학 연구의 유산에서는 그런 전통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배빗은 인문학과 과학의 결합을 요구하는 비평가들이나 시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합이 아니라 완전한 분리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배빗은 고등교육에 이르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5장 진보의 빈곤-제임스 에이지, 라이오넬 트릴링, 그리고 지식의 소외
제임스 에이지는 학교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배움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수천만 가지의 사실을 암기하고 기술을 연마했지만 이렇게 습득한 사실과 기술은 실제로 “구속감”과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감을 키워놓았을 뿐이었다.
에이지는 비학습의 과정을 통해 “감각의 전환”-어떤 유창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고 복잡하며 어떤 체계적 통일성도 부재한 가운데 열려 있는 세상과 접촉함으로써 정화되고 재생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가 광고에서 보는 세상은 에이지가 말하는 “실제”가 없는 세상, 마냥 즐겁게 끊임없이 순환하며 휩쓸려가는 텅 빈 “기표들”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면 절망에 빠질지 모른다고 에이지는 경고한다.
트릴링의 시각에서는 경험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은 무책임한 방식으로 주관적인 것을 의미했다. 관용과 공정함, 관대함의 세계에 대한 최고의 희망은, 감정과 몸의 욕구는 말할 것도 없이 지역적 지식과 충성을 뛰어넘는 세계주의적 문화 전통에 대한 신념이었다.
트릴링은 안정의 필요성과 변화에의 갈망, 다양성의 가치와 질서의 필요성 간에 평형을 유지하는 것이 비평가의 과업이라고 간주했다.
6장 이론이 치른 대가-인문학의 고립과 지식
오늘날의 인문학은 학자들이 이론에 의해 부여받은 권위를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의 덫에 ‘사로잡혀’ 있다.
이론은 특권적이고 쇠락해가는 기관들의 고유한 담론이며, 그 관심사 또한 점점 일상생활에서 멀어져서 위기감이 이론의 전문가들을 장악해버렸다. 이들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특권적인 위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각이 상식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야 했다. 이론은 참여의 폭을 확장함으로써 지적 생활을 더욱 공개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위엄의 아우라를 형성하여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론의 승리가 우리에게 뭔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안의 고갈과 진정 새로운 것을 꿈꾸는 능력의 상실일 것이다.
인문학은 최초의 비평가인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만들어낸 것이 없고 아무것도 완성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리운 눈길로 그를 돌아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비전을 갖게 되었고, 그 비전은 그에게 음악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소크라테스가 더 오래 살아서 그 꿈의 계시를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사상가의 임무를 아주 다르게 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예술과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더 만족스럽고 더 정의로우며 더 아름다운 대안들을 상상해내고 또 창조해내는 것이다.
7장 끝이 없는 세계-인문학의 비판인가 창조인가?
인문학이 이론의 노예가 되어 왔다면, 아울러 마력적인만큼 무익한 비평의 노예도 되어 왔다. 인문학이 혼돈에서 벗어나는 길은 비평 그 자체의 관습을 깨고 나오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비평은 우리의 결함에 대한 치료법을 제공하기는커녕 그 자체가 질병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비평은 반작용적이다. 다시 말해서 비평은 뭔가가 일어난 뒤에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으므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새로운 제도를 구축하는 일은 다른 분야에 맡겨야 한다. 둘째, 비평은 실제 세상의 활동과 구분되면서 그보다 우월하고 훨씬 유서 깊은 “사유”라는 관점에 단단히 묶이게 되었다.
비평의 승리는 세계적 역량, 즉 세계를 이해하는 역량을 소지식인의 시야로 잘못 나타냄으로써 인문학을 축소시켰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그리고 점차 우리의 인도를 따르고 있는 전 세계를-점령하겠다고 위협하는 잠식적인 냉소주의를 강화시켰다.
인문학은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의문”보다 “예술”에서 그 뿌리를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비평 그 자체는 어디에서나 또는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중립적 도구나 휴대 가능한 전략이 아니며, 불행한 역사적 순간에 속한 활동이자 파괴적이고 동시에 굉장히 불평등한 제도적 권력 형태에 속한 활동이다. 또한 인문학이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그 자체가-이것이 창작 활동의 최우선적 유산인데-진정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탄생시키는 기회가 된다. 여기서 예술은 비평적 연구나 문화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실질적인 예술창작이다. 인문학의 목적은 전문지식과 일상적인 생활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8장 영혼이 있는 전문가-대학 밖의 인문학
오늘날 미국에는 사실상 아주 다른 두 전통의 인문주의적 사고가 있는데, 하나는 학문적이며 엘리트적인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대중적이며 민주적인 것이다. 전자는 아마도 “이론”으로 가장 잘 대표될 것이고, 후자는 흔히 “뉴에이지”로 비하되는 거칠고 복잡한 담론이다.
인문학의 입장에서 볼 때 “또 다른 인문학”인 뉴에이지의 담론은 심각한 골칫거리로 보일 수밖에 없다. 우선 이를 주도하는 인물들이 적어도 우리들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대중적이다. 또 한 가지는 종교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인데, 오늘날 대학 내부뿐 아니라 외부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매우 미약한 종교적 가치라도 ‘언제나’ 근본주의적이라고 이해된다. 대학 내부의 우리는 주관은 객관적인 사회적 힘의 “결과” 이상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고양된 사회의식을 생성하려고 애쓴다. 달리 말하면 자아는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학 외부의 많은 사람들은 더 유연하고 확고하며 독립적인 자아, 대학에 있는 우리가 근본적이고 저항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회적 힘에 저항할 수 있는 자아를 탄생시킴으로써 사회적 혁신이 시작될 거라고 믿는다.
9장 “예술은 사랑을 섬긴다”-인문학을 위한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술
고유하고 특별한 이 세상은 우리의 선조들이 종종 간과했던 방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충분히 오래 그리고 면밀히 바라보면 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당신과 나 모두에게 보편적인 어떤 특징을 드러내 보인다. 예술은 언제나 이런 가르침을 주었으며 20세기 동안 과학을 따라가려다 실패한 인문학도 그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이를테면 모든 세대는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데, 예컨대 그 까닭은 세대마다 다른 역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세대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역사와 철학, 문학의 목적은 당신과 나에게 무관한 진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장 유용한 진리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다른 인간의 진리는 있을 수 없다 인문학이 삶의 예술, 자기수양의 예술로 재창조될 때라야만 좌파와 우파 간의 “문화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고급이론의 방해를 받지 않고 대상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경험의 양식으로서의 예술-의식(儀式)의 형태로서의 예술-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인문학이 제공하는 진리라는 것은 과학의 진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문학의 진리는 일차적으로 인문학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만드는가에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비차별적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문학의 중심에 예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인문학이 비평의 관행에서 돌아선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다행히 그 대안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해석”이다.
10장 숲의 심장부로의 여행-20세기의 아마추어와 전문가
전문가들이 지식의 개념을 자신들의 이미지에 따라 완전히 바꾸어버렸으므로 우리 대부분은 우리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식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로, 심지어 터무니없는 일로까지 여기는 것 같다. 결국 대학과 학문은 오로지 지식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로페셔널리즘과 그 인간적 결과에 대해 점차 깊은 불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 시스템 내부의 사람들이다
10장에서는 인문학과 지식 전반에 대해 아주 다른 두 방향의 미래를 제시한 두 명의 인물을 다룬다. 두 방향 중 첫 번째는 과학을 모델로 한 전문적인 인문학으로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를 예로 든다. 그는 지난 40년간 인문학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한 과학자이다. 또 한 사람은 지명도가 훨씬 떨어지는 사람으로, 사실 그의 이름을 들어봤다는 사람조차 만나보지 못했다. 얼 파커 핸슨은 학문적으로 만든 동기에 대해 좀 더 솔직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왜 학문을 뛰어넘어 생각해보려 하지 않는가? 과거를 되풀이하는 미래가 대부분의 결정론자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분명 더 어둡고 힘든 것이라면, 결정론적 사고에 의한 확신을 왜 포기하지 않는가? 인간다움이 인문학으로 되돌려진다 하더라도 이를 거부하는 공격의 움직임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인간이 지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속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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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 감사의 말
1부
1. 인문학을 바깥세상으로
2. 민주주의의 태양, 서구에서 지다 - 유능한 시민에서 무지한 대중으로
3. 거대한 분리 - 시민사회와 전문가
4. 영문학의 문제 - 전문적 인문학의 부상과 함께 인문학이 시민사회를 유기하다
5. 진보의 빈곤 - 제임스 에이지, 라이오넬 트릴링, 그리고 지식의 소외
2부
6. 이론이 치른 대가 - 인문학의 고립과 지식
7. 끝이 없는 세계 - 인문학의 비판인가 창조인가 ?
8. 영혼이 있는 전문가 - 대학 밖의 인문학
9. "예술은 사랑을 섬긴다" - 인문학을 위한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술
10. 숲의 심장부로의 여행 - 20세기 아마추어와 전문가
- 후기 : 가르침이 과연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을까?
- 역자후기
-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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