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그날의 날씨는 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류를 단련했다!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준 날씨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지구 온난화까지. 날씨는 역사의 흐름을 차분하게, 혹은 격렬하게 만들어왔다. 비바람은 전쟁의 승패를 갈랐고, 쏟아지는 비는 대기근을 불러왔으며, 화산 폭발은 인류의 낮을 지우고 동시에 인류 최악의 전염병을 몰고 왔다. 오늘의 날씨가 내일의 역사가 된 것.
『날씨가 만든 그날의 세계사』는 잘 알려진 역사의 ‘그날’ 이면에 작용한 날씨의 힘이 새로이 보여주는 것은 물론, 역사 전반에 날씨가 끼친 영향을 다시금 느끼게 만든다. 그에 더해 날씨와 기후전문가들이 절대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온난화의 주범과 날씨의 변화에 제대로 도모해 지금의 역사를 제대로 써내려가는 방법까지 톺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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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황제를 처단한 폭우, 독재자를 위협한 안개!
그날의 날씨는 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류를 단련했다
로마제국이 황금기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준 날씨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지구 온난화까지
오늘의 날씨는 내일의 역사가 된다
워털루 전투의 그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히틀러가 안개 때문에 테러가 일어날 맥주홀을 서둘러 떠나지 않았다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그날 해풍이 몰아쳤다면!
만약, 역사의 ‘그날’ 날씨가 맑고 쾌청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기원전 200년 로마로부터 시작해 2015년 현재 캘리포니아 가뭄까지. 날씨는 역사의 흐름을 차분하게, 혹은 격렬하게 만들어왔다. 따뜻한 날씨에 제국은 번성했고, 추운 날씨에는 침략과 전쟁이 일어났다. 비바람은 전쟁의 승패를 갈랐고, 쏟아지는 비는 대기근을 불러왔으며, 화산 폭발은 인류의 낮을 지우고 동시에 인류 최악의 전염병을 몰고 왔다. 이 책은 잘 알려진 역사의 ‘그날’ 이면에 작용한 날씨의 힘이 새로이 보여주는 것은 물론, 역사 전반에 날씨가 끼친 영향을 다시금 느끼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에 더해 날씨와 기후전문가들이 절대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온난화의 주범과 날씨의 변화에 제대로 도모해 지금의 역사를 제대로 써내려가는 방법까지 톺아볼 수 있다.
우리의 기분은 날씨에 의해 쉽게 좌우된다. 날씨가 좋으면 붕붕 날던 기분도, 날씨가 흐려지면 빗방울과 같은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이렇게 날씨는 인류에게 사소한 기분을 전하는 동시에 기근, 가뭄, 기나긴 장마와 어둠, 혹한, 버티기 힘든 질병으로 이어지며 인류사에 어마어마한 궤적을 그려냈다. 날씨는 인류에게 기회이자 전환점이었으며, 천벌이자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날’의 날씨는 인류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제국과 문명마저 무너뜨리는 날씨의 힘
로마제국 전성기에는 매년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포근하고 변덕 없는 날씨 속에서 충분한 소출량을 기반으로 그들은 안정적인 정치를 다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혹한이 닥치면서 로마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어진 황제가 이어지던 평화는 깨지고, 황제의 자리는 1년이 채 가지 않는 피의 옥좌가 되었다. 잔혹한 권력 찬탈의 칼바람을 맞으며 제국의 땅은 쟁기를 댈 수 없을 만큼 굳게 얼어붙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땅이 얼며 날씨의 신이 완전히 그들을 저버렸을 때 로마는 멸망하고 말았다. 거대한 제국조차 하늘의 힘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멸망 이후, 날씨의 신은 더 무서운 기세로 고대 문명까지 뿌리 뽑아 버린다. 1,000년 이상 꽃을 피웠던 마야 문명은 오싹할 정도로 웅장한 문화유산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좁은 면적에 1,000만 명의 인구가 밀집해 살면서 잦은 벌목과 개발이 잇따랐고, 토양의 변화는 곧 날씨의 변화를 가져왔다. 기나긴 역사와 엄청난 인구는 가뭄과 기근을 마주하며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날씨의 신, 승자와 패자를 가르다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지형을 재치 있게 활용한 스파르타의 최정예부대에 휘둘린다. 하지만 결국 그들을 화살받이로 만들어 승리를 거두며 ‘신왕’의 위용을 뽐낸다. 그러나 이 위대한 왕조차 그리스 연합군을 맞아서는 참담한 패배를 거두고 말았다. 거센 입김을 내뿜는 바람의 신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의 군선은 그리스 연합군의 4배에 달했지만, 거센 바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선고가 높은 배들은 서로 부딪치며 부서져 내렸고, 그 틈을 타 연합군은 맹공을 퍼부었다. 이처럼 약소국에게 바람의 신은 유독 후한 면모를 보였다. ‘신풍’이라 불리는 신의 바람, 가미카제는 엄청난 부대를 이끌고 일본을 침략한 몽골군으로부터 일본을 지켜주었고 이후 가미카제는 일본의 신화가 되었다. 영국 또한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투에서 해풍의 도움을 받았다. 무적함대는 전투에서 50척의 배와 5,000여 명의 병사를 잃었지만 영국은 작전에 사용한 배 외에 한 척도 잃지 않았으며, 150명의 사상자만 냈을 뿐이었다. 영국은 이날의 전투를 기념하며 기념주화에 “신께서 바람을 보내시니 그들이 흩어지더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정녕 ‘신’이 승패를 갈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투였다.
역사 속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한 날씨
날씨는 황제와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한 독재자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정복욕에 불타는 황제에게는 매서운 추위와 끈질긴 비가 따라붙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잔혹한 추위에 떨고, 워털루의 진흙 속에서 질척거리다가 결국 정치 생명을 마감하고 말았다. 인류에게 홀로코스트라는 재앙을 안겨준 독재자 히틀러는 안개에 울고 웃었다. 폭탄이 설치된 맥주홀에서 안개 덕분에 테러를 피한 그는, 본국에서 치러진 전투에서는 갑자기 안개가 걷혀 연합군에게 되레 당하고 만다. 직경 40센티미터가 넘는 우박이 프랑스 제3신분의 울분에 도화선을 그으며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이후, 수많은 이들을 단두대로 보내는 ‘공포정치’라는 참혹한 결과를 자아낸다. 그러나 끝날 것 같지 않던 참수는 한바탕 쏟아진 장대비로 막을 내린다. 공포정치의 수장인 로베스피에르가 마지막 변론 기회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의 변론을 듣기 위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쏟아지는 비에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권총에 맞아 부서진 턱을 하고 단두대에 올라 마지막 대중연설을 장식하고 만다.
책속으로 추가
화이트가 다시 아메리카 대륙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590년이었다. 손녀인 버지니아 데어의 세 번째 생일에 맞춰 방문한 것이었지만, 화이트는 그곳에서 손녀를 만나기는커녕 그 어떤 정착민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영국 개척민들이 구축한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전쟁이 지나간 흔적도 없었다. 화이트와 그 일행이 발견한 것이라고는 어느 나무 울타리에 새겨진 ‘크로아톤(Croatoan)’이라는 글귀뿐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어느 원주민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거나 식민지 개척자들이 이주해 간, 곡식을 구할 수 있는 어느 섬의 지명일 것으로 해석했다. 로어노크 섬의 운명을 둘러싼 비밀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p.136~137
무적함대는 총 129척의 전함 중 50척을 잃었다. 비전투적 손실, 즉 영국군과의 전투에서가 아니라 악천후로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 선원만 해도 5,400명에 달했다. 영국은 일부러 불을 붙여 띄워 보낸 8척 외에 교전 중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고, 전사자도 150명 안팎에 그쳤다. 영국 왕실, 혹은 선주들이 전쟁이 끝난 뒤 파손된 선박 수리를 위해 지급해야 했던 비용은 전투에 임하기 전 선박을 점검하고 보수하느라 지불한 비용보다도 적었다. 그만큼 영국이 완승을 거뒀다는 뜻이다. 펠리페 2세는 “나는 우리 배들을 영국군과 싸우라고 보낸 것이지, 바람이나 풍랑과 싸우라고 내보낸 것은 아니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내용은 영국과 다른 신교 국가에서 발행된 기념주화에도 드러나 있다. “신께서 바람을 보내시니 그들이 흩어지더라(Flavit Jehova et dissipati sunt)”라는 내용이 주화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p. 154~155
그런데 어디선가, 무언가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대자연이 내는 소리였다.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 소속 한 장교의 진술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영국군의 동향을 살피며 대기하고 있을 때 세계의 종말을 암시하는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고 한다. “단 몇 분 만에 하늘이 먹물처럼 새까맣게 변했다. 수평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 사이가 모두 깜깜했고, 주변은 번개가 칠 때 잠깐씩만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가 흡사 대포처럼 땅 위로 내리꽂히면서 쉴 틈 없이 모든 지역을 강타한 것”이었다. p.171
빵 값은 18세기 들어 최고가로 치솟았고, 국민들은 평균 수입의 90퍼센트 가까이를 식량 구입에 써야 했다. 그대로는 계속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역사가 조르주 르페브르는 “혁명 전날 밤, 기근은 프랑스 국민 절반 이상의 가장 큰 적이었다”라고 서술했다. 영국의 프랑스사 전문 사학자 앨프리드 코번은 “흉년이 든 이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그 이듬해에 너무 일찍 찾아온 여름이었다. 지난해 수확한 곡식은 바닥이 났는데, 올해는 아직 곡식이 익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하기도 했다. 1789년에도 여름이 일찍 찾아왔다. 그해 7월 14일, 프랑스 공화국의 최대 국경일이 된 바로 그날, 앙시앵 레짐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 파리 전체에 울려 퍼졌다. p.189
그런데 그때, 불안감에 휩싸인 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군중을 해산해 버린 사건이 터졌다. 7월 28일, 테르미도르 제10일로 넘어가던 날 자정을 즈음해서 며칠째 이어지던 고온다습하던 날씨가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폭우는 단 몇 분 만에 파리의 지저분한 거리들을 급류처럼 휩쓸었고, 몰려들었던 군중들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에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혁명을 향한 시민들의 불꽃같은 염원을 폭우가 순식간에 잠재워 버린 것이었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새벽 2시쯤 로베스피에르가 시청사 창밖으로 그레브 광장을 내다보았을 때,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p.196~197
그 사이 벨라루스의 몰로데치노까지 이동한 나폴레옹은 12월 5일, “끔찍한 계절이 프랑스군에게 닥친 그 모든 재앙의 원인임”을 선포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나폴레옹의 메시지는 12월 16일 파리 언론에 보도됐다. 하지만 황제 숭배 사상과 철저한 언론 검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프랑스인들은 행간을 읽는 데에 매우 능했다. 프랑스군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의 건강은 최상이다!”라는 보도를 믿는 이도 많지 않았다. 열렬한 황제 추종자만이 그 문장에서 다소 위안을 찾았을 뿐이다. p. 212~213
하지만 밤새 폭우가 내린 뒤에는 포탄이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프랑스군이 쏜 포탄이 웰링턴의 군대 가까이에 떨어질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진흙탕에 박힌 채 ‘꾸르륵’ 소리만 내며 불발탄이 되거나 폭발한다고 해도 적군에게 진흙을 튀기는 정도의 위력밖에 발휘하지 못할 공산이 큰 것이다. 나폴레옹이 작전 개시 시간을 미룬 것도 그런 계산 때문이었다. (중략) 결국 나폴레옹은 충성심 깊은 친위대들이 자신을 위해 진흙탕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죽어가는 동안 홀로 전장을 빠져나갔다. 비록 전쟁에서 목숨은 구했지만, 그의 정치적 생명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p. 222
포도주를 나눠 마신 두 장군은 대통령 관저도 불태웠다. 그다음 순서는 재무부 건물이었다. 불길이 얼마나 환했는지, 그 자리에 있던 영국 병사는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옆 병사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그때, 날씨의 자비로운 손길이 불타는 수도 워싱턴을 보듬기 시작했다. 하늘이 베푼 자비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피해가 더 커진 바도 있지만, 대체로 그때의 날씨는 미국에 도움이 됐다. 천둥 번개가 하늘을 뒤덮는가 싶더니 영국군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토네이도가 발생한 것이다. p.228
메리는 그 시간들에 대해 “한 계절이 지나가는 내내 추운 날씨와 비가 이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저녁이면 치직 소리를 내며 타는 난로 앞에 모여 앉아 독일 유령 이야기들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라고 기록했다. 메리는 유럽 본토를 여행하는 동안 이미 집을 잃은 사람, 고향을 잃은 사람,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이유로 인해 도처를 떠돌면서 많은 이들의 혐오 대상이 된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했고, 메종 샤퓌에 머무르는 동안 그 만남의 기억들을 모아 캐릭터 하나를 빚어냈다. 추운 계절의 무자비함보다는 인간의 야만성으로 인해 더 큰 고통을 겪는 캐릭터, 메리 자신이 느끼고 겪었던 모든 감정들을 한 몸에 담고 있는 그런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 메리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창조 과정을 직접 주관하겠다는, 대담하다 못해 오만한 인간의 만행을 고발한 이 소설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도 지구라는 행성 곳곳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p. 245
그는 연설을 마친 뒤 동지들과 나누는 악수 시간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누가 봐도 히틀러가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9시 20분쯤에는 히틀러와 수행원들뿐 아니라 2,000~3,000명으로 추정되는 청중들 대부분도 이미 맥주홀을 떠난 뒤였다. 폭탄은 엘저가 원했던 바로 그 시각인 9시 20분 정각에 지축을 뒤흔드는 육중한 굉음과 함께 터졌다. 폭탄은 히틀러가 몇 분 전까지 서 있던 연단 주변을 초토화시켰고, 나아가 거대한 맥주홀의 지붕까지 무너뜨렸다. 만약 그해 11월 8일에 히틀러가 열차 대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면, 그래서 출발 시각을 굳이 앞당길 필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치 정권은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빈자리를 채울 후계자를 못 찾지 않았을까? p.254~255
사실 아이젠하워는 상륙 작전 기일을 다시 한 번 미룰까도 고민했는데, 그랬다면 작전 개시일은 아마도 6월 19일이 됐을 것이다. 6월 19일쯤이면 프랑스 해안에 상륙을 위한 교두보도 이미 구축됐을 테니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스태그의 기상분석팀조차 예측하지 못한 대규모 돌풍이 일었고, 연합군의 예상 상륙 지점 인근은 모두 바람에 휩쓸려 초토화됐다. 파고가 심지어 6미터에 달할 때도 있었다. p.280
다음 날 저녁, 카터는 이란에서 발생한 대참사와 작전 실패의 원인을 설명하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인들은 작전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 하부브였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정치적, 군사적 무능 역시 큰 몫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제기됐다. 전 세계 최고의 군사 강국인 미국이 왜 그토록 위험한 작전에 헬기를 단 8대밖에 투입하지 않았는지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독수리 발톱 작전의 실패는 카터 정권의 생명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p.310
카트리나 발생으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뉴올리언스는 재난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제방 시스템도 강화됐다. 물론 아직도 관광객들이 기피하는 슬럼가는 존재한다. 다시 한 번 허리케인과 같은 재난이 발생한다면 이번에도 자력으로는 목숨을 구제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들이다. 하지만 그 사이 뉴올리언스는 생명과학 분야의 기업들을 유치했고, 멋진 바와 부티크호텔들도 문을 열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강대국 미국인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다. 그 어떤 첨단 기술과 인간의 노력으로도 대자연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p.321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푸른 잔디로 뒤덮인 교외 지역이 곧 황폐한 사막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상황이 눈에 뻔히 보이는 지금, 캘리포니아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모르긴 해도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옵션 중 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리라. 이로써 캘리포니아가 진정한 개척자 정신이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자랑스럽게 보여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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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정보
프롤로그
지구라는 배
기원전 200년~기원후 300년
로마를 번영케 만든 날씨
기원전 480년 9월
그리스군을 지켜준 날씨의 신
535~542년
캄캄한 낮으로부터 시작된 인류 멸망의 위기
9세기
마야 문명이 멸망한 진짜 이유
950년, 1000~1300년
과거에도 지구온난화가 있었다?: 중세 온난기
1274~1281년 그리고 1944~1945년
‘가미카제’가 빚어낸 희비
1315~1350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 기나긴 비
약 1315~1850년
중세에 찾아온 빙하기
1588년 여름
무적함대로부터 영국을 구한 ‘신교도의 바람’
1709년 1월
기억 속 가장 추웠던 겨울
1776년 8월과 12월
미국을 만들어 준 비바람과 눈폭풍
1788년 7월 13일~1789년 7월 14일
거대한 우박이 불러온 프랑스 혁명
1794년 7월 27~28일
로베스피에르의 목을 거둔 장대비
1812년
나폴레옹의 운명 I: 러시아의 극심한 기상이변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의 운명 II: 워털루의 폭우와 진흙탕
1814년 8월 25일
불타는 백악관 위로 쏟아진 폭우
1815~1816년
여름이 없는 해
1939년 11월 8일
대학살을 예고한 그날의 안개
1941년 12월
야망을 잠재우는 혹독한 추위
1944년 6월 6일
폭풍 속의 고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4년 7월 20일
독재자를 살린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
1944년 12월
히틀러 최후의 반격: 벌지 전투와 안개
1980년 4월 24일
모래 폭풍 속의 최후: 독수리 발톱 작전
2005년 8월 29일
기억하기 싫은 이름
2015년 여름
미국의 신화 그리고 날씨의 미래
에필로그
지구온난화에 관한 짧은 고찰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