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소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보는 정사 차원의 ‘소설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인공인 유성룡은 전시 재상으로 불릴 만큼 임진왜란 7년 전쟁 내내 조선군의 중심과 핵심의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전투와 전쟁 외교, 전술전략 등을 직접 세우거나 체험했다. 명군과 일본군 사정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아는 위치에 있었다. 작가 이재운은 그런 전시 재상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구성한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왕은 나라와 백성을 어찌하려는가?
징비록에서 역사를 다시 묻는다
조선 왕조 6백여 년의 역사 중 가장 치욕스러운 세 장면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 치하가 시작되는 경술국치. 이런 오욕의 역사를 안고 오늘의 대한민국 헌정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과거 역사의 치욕을 딛고 건강한 대한민국의 건설에 앞장서 왔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요즘 같은 혼란의 시대에 4백 년 전에 이 강산을 피폐화시켰던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참상을 되새겨보는 반성쯤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 조정의 무능함과 집권층의 사리사욕으로 뭇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고, 임진년의 참혹함을 되새겨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의 당파 싸움으로 백성들은 또다시 병자호란의 뭇매를 맞아야 했다. 그 후 우리는 36년간의 참혹한 일제치하를 겪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의 치욕스런 역사의 자리를 돌아보기나 했는지,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나서는 그 치욕의 잔재를 아직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나가야 한다.
가슴 아픈 역사의 반복은 패배다. 우리는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
여기 임진왜란 7년의 전쟁을 낱낱이 고하며, 후세 백성들에게 임진왜란의 참상을 보여주고 반성의 보고를 남긴 조선조 최고 전시 재상 유성룡의 기록이 있다. 바로 [징비록]이다. 7년간의 전쟁 기록으로, 후세 인들에게 경계를 던졌던 유성룡의 반성이 오늘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작가 이재운에 의해 [징비록]은 소설적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다가와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작가는 실패한 역사의 반복은 패배일 뿐이라며, 그 역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책 내용】
* 전시 재상 유성룡이 일갈하는 이 시대 반성의 비망록
소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보는 정사 차원의 ‘소설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인공인 유성룡은 전시 재상으로 불릴 만큼 임진왜란 7년 전쟁 내내 조선군의 중심과 핵심의 자리에 있으면서 많은 전투와 전쟁 외교, 전술전략 등을 직접 세우거나 체험했다. 명군과 일본군 사정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아는 위치에 있었다. 작가 이재운은 그런 전시 재상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는 소설을 구성한 것이다.
작가는 그 전에 [소설 토정비결], [당취], [소설 이순신]을 썼다. 이번이 임진왜란 소재로 쓴 네 번째 소설인 셈이다. 가장 먼저 발표한 [소설 토정비결]에서는 토정 이지함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선각자들이 왜란을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다루었다. 그 뒤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기는 승군들의 활약상을 중점적으로 다룬 [당취]를 신문 연재소설로 발표했다. 평양성 수복 전투, 행주산성 대첩, 진주성 대첩, 금산벌 전투, 이순신의 수군 전투 등에 매우 많은 승군이 참전했는데, 유학자들이 적은 역사에는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되거나 빠져 있어서 역사 보정 차원에서 공들여 썼다. 이후 [소설 이순신]에서는 [당취]에서 이미 원균과 이순신의 은원 관계를 충분히 다루었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이순신 개인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을 구성해 나갔다. 그래서 이 소설 [징비록]에서는 기존의 임진왜란을 소재로 쓴 소설을 모두 집대성한 다음, 유성룡의 [징비록]을 경계삼아 7년 전쟁의 모든 참상과 백성들의 아픔을 담아낸 역작이다.
* [호종일기]를 기록한 이효원의 후손으로서 그 역사의 현장을 후세에 알릴 책무로 임진왜란의 소설들을 집필한 작가 이재운에 의해서 역사의 반성을 떠올린다.
작가는 개인적으로 선조 이균과 왕세자 광해군을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예조 참판 이관, 예조 좌랑 이효원 부자의 후손으로서 집안에 전해져 오는 [호종일기(임금과 왕세자를 모시고 피난 다니면서 매일 기록한 일기)]를 탐독했다. 당시 경상 좌병사 이각은 이관 할아버지의 동생이자 이효원의 삼촌이다. 병마사로서 동래부를 구원하지 못하고, 또 본영인 울산마저 지켜내지 못한 채 임진강 전선까지 후퇴했다가 왕명으로 참형을 받으셨다고, 작가는 이 책에서 후손으로서 사죄를 드리기까지 한다. 선조 시절 승지에 오른 이효원은 광해군 때 대사간이 되지만 곧 당쟁에 휘말려 거제도로 14년간 유폐되며 작가의 집안이 충남 청양으로 은둔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에는 영광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광 뒤에 숨은 아픔의 역사를 치유하고, 반성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우리에게 닥친 분란과 엉킴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그 지혜의 길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절절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우리에게 혹독한 반성을 요구한다.
*자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친 전사자 명단과 더불어 수많은 백성들의 희생을 교훈으로 삼게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삭탈관직 된 유성룡은 녹봉을 끝내 받지 못했다. 큰아들이 먼저 죽는 불행마저 겪었고,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타계할 때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인근 선비들이 추렴해 쓸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더 이상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임진왜란의 참상을 후세에 전하는 값진 일을 해낸 전시 재상 유성룡. 그가 지은 [징비록] 에는 전쟁을 이끈 장수나 의병, 백성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후세 인들에게 경계의 징표로 남겼다. 그럼으로써 목숨을 잃은 백성들의 원혼이 헛되지 않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을 요구할 것이다.
작가 이재운은 왜란 당시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명단을 소설 말미에 기록하고 있다.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에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거나 죽은 지휘관들의 명단이다. 이분들의 부하들은 안타깝게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따라서 전사 지휘관 한 명당 적어도 수백 명의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이 무명 전사자들의 희생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 전사자도 이처럼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데, 하물며 백 년도 안 된 친일 부역자의 명단쯤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정확하게 적을 수 있다고. 우리는 지금부터 그 일을 해내야 한다고. 역사를 두려워하는 백성만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고. 그래서 아픈 역사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이 소설 [징비록]에서는 역사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꾸려갈 원동력을 찾아내는 작업을 우리에게 숙제로 던지고 있다. 또한, 자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이름을 한자로 기록해놓고 있다.
【작가의 말】
유성룡의 [징비록]은 사실상 ‘징비(懲毖)’에 실패한 책이다.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 없다가 서인들이 적은 [수정 실록]에서 유성룡 졸기를 넣으면서 처음으로 [징비록]을 언급하는데, ‘식자들은, 자기만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 하여 이를 나무랐다.’며 깡그리 무시했다. 또한, 유성룡을 가리켜 ‘국량(局量)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風節)이 없었다.’고 악평을 남겨버렸다. 그 뒤 [징비록]이 다시 언급된 것은 숙종 38년인 1712년으로, [징비록]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며 금단(禁斷)해달라고 청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즉 왕과 재상, 누구도 [징비록]을 탐독한 적이 없다.
대신 적국인 일본 교토(大和屋 伊兵衛)에서 1695년에 출간되어 널리 읽혔다. 조국 조선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36년 총독부 직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가 처음으로 300부를 영인 출간하였으며, 1969년 11월 7일에야 국보 132호로 지정되었다.
이 소설에 '전시 재상 유성룡'이라고 쓴 타이틀은 사실 적국 일본에서 붙인 별칭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삭탈관직시키고, 그가 쓴 [징비록]은 동인의 시각으로 편향되게 집필된 책이라 하여 서인 정권으로부터 무시되었다. 이들은 선조실록조차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수정 실록]을 만들기도 했다. 적군이 무서워한 유성룡, 이순신, 사명당의 승군, 곽재우 등의 의병장을 정작 우리 조정은 잡아다 죽이려고나 하고 삭탈관직 혹은 역적으로 몰아붙였다.
유성룡은 왜란이 터지던 시기의 좌의정이었는데, 몽진 중인 개성에서 삭탈관직 되었다. 그의 이력에는 대부분 왜란 시기의 도체찰사라고 나오지만, 그래서 마치 조선군 총사령관쯤으로 묘사되지만 그건 훨씬 뒤 정유재란 때 잠시 잠깐의 일이다. 임진년에는 주요 전투가 끝난 이듬해에 겨우 관서 도체찰사가 될 뿐이다.
임진년, 그는 무보직 상태에서 '백의종군' 형식으로 행궁을 지켰다.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을 뿐이다. 유성룡은 조선군 지휘권이 명나라에 넘어가자 비밀리에 유격군을 운용하기도 했고, 그러다 명군에 저지당하고, 다투고, 무릎을 꿇기도 했다. 그가 전쟁 전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해 전선에 보냈다는 엄청난 기적은, 이후의 역사서에서 단순한 우연으로 간주하였다.
임진왜란이 숨 고르기를 한 뒤 유성룡은 잠시 영의정에 오르지만, 정유재란을 치르자마자 곧바로 삭탈관직 되었다.
왕조실록에도 유성룡은 호종공신 1등이 아니고 2등일 뿐이다. 3등에 내시 24명이 대거 포함된 걸 보면 내시보다는 좀 낫다고 해주었을 뿐이다. 왕 옆에 착 붙어 명나라로 도주할 것을 종용하던 이항복이 1등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성룡이 징비록을 남겼음에도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마침내 왜란의 후예들에게 강점되고 끝내 나라가 분단되는 지경에 이른다. 오늘의 일본이 휘두르는 욱일승천기라는 깃발, 임진왜란 때 부산에 처음 상륙한 소서행장, 즉 일본군 제1군이 쳐들었던 바로 그 깃발이다.
징비록은 슬픈 책이다. 조국 조선에서는 폄하되고 도리어 적국 일본에서 출간되고, 읽히고, 가치를 인정받은 책이다. 조선은 [징비록]을 외면하면서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패전했는지 따지지 않았지만 도리어 침략자 일본은 [징비록]을 탐독하면서 왜 조선을 병탄하지 못했는지 철저히 연구, 마침내 300년 뒤 더 갈고닦은 전략과 전술로 조선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이 소설을 재밌게 읽더라도, 나라와 겨레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쓴 전시 재상 유성룡의 참회문이자 사후약방문인 [징비록]은 저술 직후부터 일제에 강점될 때까지 3백여 년간 줄곧 외면받았으며, 오늘까지 그 대가로 남북 분단 중이며, 그래서 왜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목차정보
프롤로그 전쟁의 시작
1. 조선을 의심하는 명나라
2. 임진년의 봄
3. 등등곡(登登曲)
4. 불길 오르는 봉수대
5. 조선 왕 데려다 일본 천황을 삼는다
6. 불타는 한양성
7. 행재소 타령
8.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라
9. 야, 광해군이 오셨다
10. 북풍한설(北風寒雪)
11. 행주산성
12. 진주의 눈물
13. 귀휴령(歸休令), 죽은 귀신은 돌아와 쉬어라
14. 요시라의 반간계
15. 왕자를 도로 내 놓아라
16. 무관의 숙명은 싸우다 죽는 것이다
17. 적국(赤國)으로 진공하라
18. 최후 방어선
19. 끝났으나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 말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